특별기고上 6~70년대 친형제 같았던, 질박한 현장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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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上 6~70년대 친형제 같았던, 질박한 현장 문화
6~70년대 친형제 같았던, 질박한 현장 문화
소금벌 위에 세운 철강, 그리고 형제 같았던 사람들
한 시대의 이야기는 그 시대가 남긴 풍물 속에 담겨 있다. 창립 72주년을 맞는 지금, 잊혀져 가는 동국제강그룹의 초창기 시절을 소환해 보자.
△ 1970년대 부산제강소 빌릿 작업 현장사진
1954년 7월 7일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에서 문을 연 동국제강은 1963년 부산 용호동 소금벌을 매립하면서 대규모 철강 공장을 세웠다. 포스코와 달리 민간 자본만으로 완성된 국내 최초의 대규모 철강 공장이었다. 1987년 재계 20위권으로 성장한 동국제강의 밑거름은 바로 부산제강소였다.
일면 매립, 일면 건설, 일면 생산을 동시에 이어가며 국내 최대의 전기로 철강 생산기지를 만들어낸 동국제강 대선배들이 남긴 이야기는 오늘날 더욱 깊은 울림을 전한다.
△ 부산제강소 건설 초창기 사진
국내 제1의 전기로 메이커를 일군 주역들이 어떤 역경을 극복해 왔는지는 오늘의 후배들이 꼭 기억해야 할 소중한 역사이다. 필자는 지난 6월 23일, 부산제강소가 운영되던 용호1동 177번지를 찾았다. 그곳에는 더 이상 철강 공장의 흔적도, 특유의 시큼한 냄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약 30만 평의 매립지에서 철근과 형강, 후판을 생산하던 공장의 모습은 이제 머릿속에서만 그려볼 수 있을 뿐이다.
그 자리에는 남천동 아파트 단지와 새로운 도시 풍경이 들어섰다. 소금벌 매립에서 철강 공장 건설, 그리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이어진 변모의 과정을 바라보며, 철강 산업은 늘 인간 생활의 편리를 위해 존재해 왔음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 (좌) 1980년대 광안리 해변 일대 전경사진 (우) 2026년 현재 광안리 해변 일대 전경사진
"부산제강소 초창기에는 80㎏쯤의 빌렛를 두 명이서 어깨로 져 날랐지요." 1967년 4월에 입사한 추용득 조장의 회고이다. 당시 제강 인력을 선발하기 위해서는 100㎏짜리 강괴를 옮기고 50m의 거리를 뛰는 테스트를 거쳐야 할 만큼 강인한 체력이 필요했다. 전기로에 석회를 퍼 넣고 강괴를 상차하는 일까지, 모든 과정이 사람의 힘으로 이뤄졌다.
△ 1970년대, 압연공장 앞 안전을 다짐하는 부산제강소 현장 근무자들 사진
당시 근무 복장은 대개 군화와 군복이었다 뜨거운 쇳덩어리를 다루는 작업인 만큼 흰 목장갑을 착용해야 했고, 군화에는 불꽃을 막기 위해 폐타이어를 붙여 신었으며, 군화의 잔등에는 얇은 양철 조각을 부착했다. 뜨거운 불똥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 1980년대 부산제강소 설비 정비 현장
형제처럼 지냈던 현장 근무자들의 우정 어린 풍경은 점심시간에도 이어졌다. 당시 산소공장의 조장이었던 김영호 씨의 회고에 의하면, 1978년 구내식당이 생기기 전까지는 각자 도시락을 지참해야 했다. 꽁보리밥에 단무지, 그리고 고추장과 허연 김치가 밑반찬이었지만, 간혹 점심을 거르는 근무자를 보게 되면 도시락을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이런 정겨운 모습은 1994년도에 전국에 메아리쳤던 '항구적 무파업' 선언의 밑거름이 되었다.
초창기에는 바다를 매립하던 터라 우물을 파도 물이 나오지 않아 리어카로 물을 길어와 몸을 씻어야 했다. 비가 오면 무릎까지 빠질 만큼 환경은 열악했지만, 한여름이면 공장에서 떨어진 우물가를 찾아 더위를 식히던 웃지 못할 일화도 전해진다.
당시 현장 근무자들은 일거리가 적은 날, 짬을 내서 바다에 쳐 놓은 그물에 걸린 장어를 뜨거운 강괴 위에 올려 즉석요리를 했다. 김진명 반장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부산 남구 일대에서는 '동국제강 직원이라면 외상도 믿고 내주었다'고 한다. 월급날이면 공장 정문 앞에 외상값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기도 했다.
이처럼 정겹고 절박했던 현장 근무자들의 숨결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선배들의 노고를 바탕으로 복지는 크게 향상됐고, 기업문화도 시대의 변화에 맞게 발전해 왔다. 그러나 그 시절의 현장 문화를 돌아보는 일은 더 나은 기업문화를 후대에 이어가기 위한 소중한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1997년 이후 포항으로 이어진 동국제강은 국가의 위신을 상징하는 프레스티지 산업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했다. 그 이면에는 대단위 철강 공장을 건설하기 위한 현장 근무자들의 노고와 송원 장상태 회장의 혼신의 노력이 곳곳에 배어 있다.
'동국제강이여 영원하라'는 글귀가 새겨진 비석에는 송원 회장의 염원이 담겨 있다. 70세였던 당시 송원 회장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후판공장과 형강공장의 건립 과정을 상세히 살폈다.
"내가 잠이 잘 안 오는 기라."
"1조를 투자해서 새로운 공장을 짓는데 우째 엉성하게 할 수 있겠노?"
"마, 공장 설비는 최신예의 것으로 해야 한다."
"돈이 모자라면 아내의 반지를 빼서라도 지원할 끼다."
그분의 집념이 고스란히 담긴 포항제강소의 100% 가동이 늘 이뤄지기를 염원한다.
임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건설된 당진 후판공장이 장세주 회장의 열정으로 이뤄진 것은 이미 잘 아는 일이다. 덕택에 공장이 완공되자마자 후판 경기가 활활 불타올랐던 기회를 거머쥘 수 있었다.
이제 다시 마음을 추슬러 '시대의 변화에 따라 혁신한다'는 동국제강의 경영이념에 걸맞은 새로운 기술이 줄기차게 등장하기를 고대한다.
이제 후배님들의 차례가 됐다.
글 · 김종대 (전 홍보담당 상무)
국내 최초의 제강공자인 큐폴라 공장 전경
국내 최초의 제강공자인 큐폴라 공장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