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el with you 동국제강그룹

창업주 1대 장경호 회장

‘대궁양행(大弓, 1929년)’,‘남선물산(南鮮, 1935년)’,‘조선선재(朝鮮,1949년)‘, ‘동국제강(東國, 1954년)’…선각자 장경호 창업주의 사업은 한결같이 민족의식과 불교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었습니다.

글로벌 철강기업으로 도약하며 다시 그 첫번째 못을 생각합니다.

'철강보국'의 정신으로 시작한
동국제강의 첫번째 못을 생각합니다.

기업가이며, 불교인

‘철강보국’
동국제강그룹 경영의 기틀을 세우다

선각자 大圓 장경호

(1899~1975.9.9)

  1. 장경호 회장의 생애

  2. 1899.9. 7
    동래군 사량면 초량동(현 부산시) 출생
  3. 1913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 입학
  4. 1914
    추명순씨와 결혼
  5. 1919
    보성고보 졸업, 일본 유학, 불교 귀의
  6. 1929
    대궁양행 설립
  7. 1935
    남선물산 설립
  8. 1949
    조선선재 설립
  9. 19547. 7
    동국제강 설립
  10. 1963
    동국제강 용호동 부산공장 건설
  11. 1967
    문화 및 불교 전문 출판사업
  12. 1970.2
    재단법인 대원정사 설립…불교 진흥 및 장학사업
  13. 1971
    동일제강 인수
  14. 1972
    한국철강, 한국강업(현 동국제강 인천공장) 인수
  15. 1973.5
    남산 불교회관 준공, 불교교양대학 개설
  16. 1973
    삼화제철소 삼척공장 인수
  17. 1975.7. 10
    전재산(30억원 규모, 현 시가 5천억원 추정) 기부
    불교진흥원 설립(불교방송 설립)
  18. 1975.9. 9
    입적
  19. 장경호 회장의 생애

  20. 1899.9. 7
    동래군 사량면 초량동(현 부산시) 출생
  21. 1913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 입학
  22. 1914
    추명순씨와 결혼
  23. 1919
    보성고보 졸업, 일본 유학, 불교 귀의
  24. 1929
    대궁양행 설립
  25. 1935
    남선물산 설립
  26. 1949
    조선선재 설립
  27. 19547. 7
    동국제강 설립
  28. 1963
    동국제강 용호동 부산공장 건설
  29. 1967
    문화 및 불교 전문 출판사업
  30. 1970.2
    재단법인 대원정사 설립…불교 진흥 및 장학사업
  31. 1971
    동일제강 인수
  32. 1972
    한국철강, 한국강업(현 동국제강 인천공장) 인수
  33. 1973.5
    남산 불교회관 준공, 불교교양대학 개설
  34. 1973
    삼화제철소 삼척공장 인수
  35. 1975.7. 10
    전재산(30억원 규모, 현 시가 5천억원 추정) 기부
    불교진흥원 설립(불교방송 설립)
  36. 1975.9. 9
    입적

철강보국의 꿈

“철강으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기업을 경영하겠다.”

“회사에 앞서 가정부터 돌봐야 한다. 수신제가해야 밖의 일도 잘되는 법“


“돈을 왜 버는지 아느냐? 좋은데 쓰려고 하는 것이다. 그걸 누가,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삶의 보람도 달라진다. 동국제강은 나의 것도 너희 것도 아니다. 이 나라 부강과 민족을 위해 세웠으니 동국제강은 그들의 것이다"

  • 선각자 장경호 회장의 철강보국

    일제강점기, 부산지역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서울과 일본에서 유학한 신지식층이면서도, 불교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스스로 사업을 일구고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고자 한 인물입니다. 그는 일본인이 만들어 파는 타월이 싫다며, 우리 손으로 짠 무명수건을 사용할 정도였고, 지남철로 고철을 주을 정도로 근면과 검소함으로 일관하여 주위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가 처음 사업을 시작한 대궁양행(1929년)부터 남선물산, 조선선재, 그리고 동국제강에 이르기까지 그가 세운 기업들의 사명에는 민족과 불교 의식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철과의 인연은 1949년 시작됐습니다. 남선물산의 창고에서 ‘신선기’로 철사를 뽑던 재일교포가 화재로 사업을 접게 되자, 자의반타의반 신선기를 인수하면서부터였습니다.

    1954년 서울 당산동에 동국제강을 설립할 때는 철에 대한 의지가 남달랐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를 바라보며 그는 “철강으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기업을 경영하겠다”는 신념을 담아 철강업에 매진합니다.

  •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다

    『“나는 이제 광복절을 기하여 가야겠다. 이제는 사업도 기반이 잡혔고 너희들도 먹고 살만큼 도움을 주었다. 나는 내 이름으로 남은 재산 일체를 상속 시키지 않고 국가와 사회 그리고 부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는 데 쓰려고 한다.”

    장경호 회장은 1975년 7월 10일 개인이 소유하고 있던 주식, 임야, 전답, 대지, 건물 등 30억 6300만원의 전 재산을 호국불교 중흥사업을 위해 사회로 환원한다는 헌납문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냈다.

    사회의 공동 선을 위해 그리고 이 땅에 새로운 민족정신이 불교정신에 의해 새로이 함양되길 바라며 그의 모든 것을 바친 사실이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세상에 공표되자, 7월 13일 일요일 아침 동아일보를 비롯한 전국의 언론은 장경호 회장을 대서특필, 칭송해 마지 않았다.』

    (동아일보 1975년 7월 13일자)
  • 인간 장경호의 생애

    장경호 회장이 세상을 떠나자 주요 언론들은 생전의 그를 기록하며 추모했습니다. 그 기록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단편적으로 나마 들여다 볼 수 있게 합니다.

    『고 장경호 씨는 근검 절약을 생활신조로 살아온 성실한 생활인이었다. 또한 그는 평생 땀 흘려 모은 사재 전액을 만인을 위해 쓰도록 헌납한 모범 기업인이기도 했다.
    고 장경호 씨가 얼마나 철저하게 근검 절약의 생활을 했는가는 그의 생애 편력이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음은 물론 육식조차 하지 않을 만큼 절제된 생활을 했다. 재벌 총수답지 않게 허름한 구옥에서 기거하면서 선풍기의 바람을 즐겼고 환갑잔치마저 만류할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했다. 장 씨는 인화를 늘 강조하면서 가정에서는 자녀들에게 우애를 가르쳤고 회사에서는 사원들에게 직장생활에 앞서 가정생활에 충실할 것을 당부해 왔다.』

    (매일경제신문 1975년 9월 10일자)
  • 개척자 – “바다를 메워라” (1963년 부산공장 기공)

    “하나의 업은 100년을 내다보고, 하나의 공장은 10년을 내다보라”

    장경회 회장의 창업정신은 1963년 부산 용호동 22만평을 매립, 대규모 철강공장을 건설하고, 남한 최초로 고로를 건설하고, 전기로 제강 시대를 개척하는 등 한국 철강산업의 태동기를 이끌었습니다.

    용호동 갯벌을 메운다고 할 때, 많은 이들이 무모한 도전이 아니냐는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장경호 회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집념으로 갯벌을 메워나갔습니다. 그렇게 지어진 부산 용호동 부산제강소는 국내 최초의 일관 철강사로서 전기로 제강시대를 열었습니다.

  • “검소와 성실을 실천”

    “부산지역에서는 신학문을 제일 먼저 흡수한 신지식층 이었으나 평소 생활은 검소와 성실을 실천한 분이었다.

    부유층의 아들로 청년시대에 빠지기 쉬운 화려한 기분도 한 번 경험해보지 않았고, 그 흔한 양복도 한 번 안입고 검소한 무명 한복으로 사업에만 열중했다. 그는 일본인이 만들어 파는 수건이 비싸다고 우리 손으로 짠 무명 수건으로 얼굴을 닦을 정도였다.

    매사에 신념으로 일관했던 그분의 모습은 내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김용주(전 전남방직 회장)의 회고

비움의 리더십

호는 대원(大圓),1954년 서울 당산동에서 오늘날의 동국제강그룹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무에서 시작해야 했던 시대를 스스로 개척했고, 땅에 떨어진 못 하나도 아끼는 검소를 동국인들에게 몸소 실천해 보이셨습니다.
장경호 창업자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그가 스스로 이룩해 낸 모든 것을 사회로 환원했다는 점에 수렴됩니다.
기업인의 탐욕이 넘쳐나던 시절, 앞장 서서 비움을 실천한 그의 행위는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사랑의 실천이자, 신념의 실천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좌우명('자아를 발견하고 세상에 낙원을 이룩한다')대로, 그는 동국제강이 한창 주가를 올리던 1975년, 사유 재산 30억 원(현재 가치로 약 5,000억 원)을 국가에 헌납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기업인이면서도, 평생 불교 정진했고, 문화 진흥에 힘썼던 그를 기려 불교진흥원이 설립됩니다.